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콜트레인 (문단 편집) == 사생활과 대인 관계 == 요구 사항을 똑부러지게 이야기 못하고 에둘러 말하거나, 고민 거리가 있어도 혼자 간직하고 있던 경우가 상당히 많았던 탓에 [[내향적|'내성적 인간']] 그 자체였다는 것이 주변인들의 중평이다. 다만 음반사나 클럽과 전속 혹은 출연 계약을 맺을 때만은 공격적이고 까탈스러운 모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. 이는 초짜 시절 프레스티지와 애틀랜틱 같은 음반사들이 녹음은 있는 대로 해간 뒤 나중에 자신이 유명해지자 아무 동의 없이 그걸로 음반을 마구 찍어내던 행태에 상당히 자주 데였기 때문이기도 했다. 밴드 리더로 보여준 리더십은 [[마일스 데이비스|마일스]]처럼 가히 [[독재]]에 가까운 [[카리스마]]와는 거의 정반대였는데, 리허설 때는 물론이고 공연 중에도 밴드 멤버들 사이에 이견이 있어서 벌어지는 ~~[[키배]]~~설전에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. 다소 다혈질적이었던 드러머 [[엘빈 존스]]의 경우에는 밴드 멤버와 불안정한 협주가 끝난 후 리더의 우유부단함에 빡친 나머지 콜트레인의 자가용을 [[개발살]]내기도 했는데, 그 때도 화를 내기는커녕 '차야 다시 사면 되지만 엘빈 존스같은 뛰어난 드러머는 없다'라면서 엘빈을 달랬다고 한다. 비밥 시대의 여느 재즈 뮤지션들과 마찬가지로 마약에 탐닉한 것은 매한가지였지만(특히 트럼페터 리 모건이랑은 이래저래 약으로 같이 맺어진 사이), 마일스의 퀸텟에서 잘린 뒤에는 어지간히 충격을 받았는지 방에 틀어박혀 며칠이고 물만 마시며 금단 현상을 이겨내는 [[근성]]을 보여주었다. 심지어 [[술]]도 이 때 완전히 끊었고, 아주 가끔씩 [[담배]] 피우는 것 외에는 일체의 기호품을 가까이하지 않았다([[채식주의]] 식습관도 이 때 시작되었다).[* 다만 콜트레인이 1965년부터 은밀하게 [[LSD]]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있는데, 이 주장대로라면 점차 몽상적 음악을 추구하기 시작했던 것도 저 약물의 영향이라는 것이 된다.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진위 여부는 계속 논쟁 중이다.] 사실 마약에 빠진 건 이 시대 다른 재즈 음악가들과 다를바 없었으나, 그보다 더 기본적인 인성 측면에서 그냥 쓰레기였던 [[찰리 파커]]나 [[쳇 베이커]], 항상 주변에 화가 나 있었고(...) 독선적이던 [[마일스 데이비스]] 등과 달리 바탕이 되는 성격은 내성적이면서도 온화하고, 사색적이었다고 한다. 하지만 마약 대신 중독성을 보여준 것이 [[과자]]나 [[탄산음료]]를 비롯한 단 음식들이었는데, 덕분에 치아 상태는 그야말로 개막장이 돼서 1960년대 이후로는 틀니를 끼우고 살아야 했을 정도였다. 체중도 들쑥날쑥이어서, 단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 뚱뚱해질 때와 날채소와 과일, 물만 먹는 극단적인 감량법으로 날씬해질 때를 대비해 두 벌의 옷이 필요했다고. 콜트레인의 폭식은 마약 중독 금단 증상도 있었지만, 저 전설의 카인드 오브 블루를 비롯해 다른 앨범 몇몇을 함께 녹음하며 친분이 생겼던 [[캐논볼 애덜리]]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. 다른 재즈 뮤지션들과는 상당히 이질적으로 교육자 중산층 집안에서 나고 자라 중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으로도 오래 일했던 캐논볼 애덜리는 그 시절 기준으로는 굉장히 특이하다면 특이하게(...) 술담배 빼고는 일체의 마약에 손을 대지 않았지만, 대신 엄청난 폭식과 비만이라는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.[* 콜트레인, 마일스 데이비스, 선배격인 찰리 파커의 명성에는 조금 못 미치나 캐논볼 또한 수많은 재즈 애호가들이 바로 그 파커 이후 최고의 알토 색소포니스트로 꼽았던 거장이었다. 긴 가방끈에서 나오는 풍부한 교양과 세련된 무대 매너를 자랑했던 캐논볼 애덜리는 이런 건강 문제 때문에 다른 뮤지션들과 달리 마약 한번 안 빨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40대에 요절했다.] 마일스를 통해 캐논볼과 협업하면서 사적으로도 깔끔했던 캐논볼에게 비결을 물었고, 마약을 끊는 대신 자신처럼 밥을 든든히 잘 먹을 것, 즉 일반인의 기준에선 폭식을 할 것(...)을 권유하여 콜트레인의 식단도 같이 망가져버렸다 한다. 악기 연습도 거의 중독 또는 집착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혹독하게 했는데, 탈진 직전까지 연습한 후 색소폰을 물고 잠들기도 했고 손님이 왔을 때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나와서 연습을 했을 정도였다. 그 결과 당시 색소폰의 거의 모든 연주 기교를 마스터할 수 있었고, 프리 재즈 시대에도 어려움없이 적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. A Love Supreme 앨범에서 보듯 신앙심도 상당히 깊었는데, 다만 [[개신교]]를 비롯한 서양의 특정 종교에 귀의한 것은 아니었고 [[이슬람교]]나 [[힌두교]]를 비롯한 동양의 종교/철학에 특히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. 인도 음악에 심취했던 파로아 샌더스나 라시드 알리를 밴드에 기용한 것도 비슷한 맥락인 듯 하다(그러나 그의 종교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말이 많다). 말년에는 자신이 죽으면 [[메시아]]가 될 거라고까지 이야기했는데, 메시아는 아니더라도 재즈 계의 본좌 위치는 확실히 하고 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